런던에서 나오기 열흘 전쯤, 덴비스 와이너리를 방문했습니다. 

사실 영국 와인 중 이 와이너리가 최고라 할 순 없고, 다른 궁금한 와이너리들이 있었으나 런던에서의 접근성을 생각했을 때 가장 가볼만 했던 곳이 여기였습니다. 

관광객을 위한 프로그램도 잘 갖추고 있어 햇살 좋은 날 근교 여행으로 딱 좋더군요. 

덴비스가 위치한 도킹 지역이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유명하다고 해요. 


아래 기사는 와이너리 방문 경험과 5월에 참석했던 영국 와인 생산자들의 테이스팅 행사 등을 덧붙여 전반적인 '영국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 와인21닷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영국의 빈야드를 밟다


영국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면 우선 물음표가 붙게 마련이다. 영국이라는 나라와 와인 혹은 와이너리. 이건 들어보지 못한 조합이라는 반응을 종종 접한다. 물론 영국이 세계 최대의 와인 유통 및 소비국임에는 이견을 제시하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고, 와인 교육과 평가에서도 세계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와인 생산에 관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같은 유럽 땅이라 해도 주요 와인 생산국들에 비한다면 영국은 큰 명성을 쌓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영국에서 와인 생산이 활발하지 않았던 이유를 꼽자면 변덕스러운 날씨와 포도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은 토양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와인을 일상적으로 즐겨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산을 위한 노력이 왜 없었겠는가. 아마 영국을 와인 수입국으로만 인식하고 이곳에서도 와인을 만드냐고 묻는다면, 그건 현재 이 나라에 존재하는 430여 개 와이너리에서 퍽이나 서운해할 질문이 되겠다. 

 

영국 와인 생산자 협회(English Wine Producers, EWP) 

영국 와이너리들이 모여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조직이 있다. 바로 영국 와인 생산자 협회(English Wine Producers, EWP). 몇몇 와인 생산자들에 의해 출발한 이 협회는 현재 영국의 전체 와인 생산자 중 4분의 3 이상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WP는 영국의 각 빈야드와 와인에 관한 탄탄한 데이터베이스를 갖추고 소비자들은 물론 와인업계 관계자들에게도 알찬 정보 제공을 한다. 이들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는 영국 와인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명성을 쌓아가는 것이다. 영국 와인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스파클링 와인을 두고 볼 때, 퀄리티에 대한 이들의 자부심은 샴페인에 비견할 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명성’이라는 것. 소비자 입장에서 같은 돈을 지불한다면 영국 스파클링 와인보다는 샴페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 인지도와 신뢰감 부족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EWP에서는 소비자들에게 가깝게 다가가는 ‘English Wine Week’를 매년 개최하고, 또 영국 와인 생산자들이 함께 전시회를 열어 바이어와 와인전문가, 기자, 그리고 소비자들에게 다양한 테이스팅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5월 런던에서 개최된 ‘English Wine Producers Trade & Press Tasting’ 행사는 영국 와인의 광범위함을 확인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자리였다. 행사를 준비한 주최측과 각 부스에 나와선 생산자들은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영국도 이 정도로 제법 뛰어난 와인들을 생산하고 있다고.  


[런던에서 개최된 ‘English Wine Producers Tasting’ 현장]

 

영국 스파클링 와인

영국 와인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영국 토착 품종으로 꽤 괜찮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서늘하고 비가 잦은 날씨로 인해 레드 와인보다는 화이트 와인 생산이 성공적이었고, 그보다 더 국제무대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스파클링 와인이다. 전문가들이 향후 영국 와인에 더욱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고 꼽는 요소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 현상으로 이곳이 와인 생산에 적합한 지역이 되고 있다는 점인데, 전통적인 샴페인 양조 품종인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를 생산하기에도 예전보다 나은 조건이 되었다. 이쯤 되면 몇몇 브랜드를 언급해도 되겠다. 아직 한국에는 수입되지도,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이름들이지만 현지 와인업계에서는 이미 탄탄한 입지를 굳혔거나 떠오르고 있는 와이너리들. 이들이 공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와인은 역시 스파클링이다. 먼저 여러 차례 수상 경력에 이어 올해 인터내셔널 와인 챌린지 어워드(International Wine Challenge Awards 2014)에서 클래식 뀌베(Classic Cuvée) 2009년 빈티지가 또 한번 트로피를 수상한 나이팀버(Nyetimber) 와이너리. 시음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입을 모아 칭찬하는 이 와이너리는 국제적인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내로라하는 샴페인들보다 좋은 평가를 받은 영국 스파클링 와인의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카멜 밸리(Camel Valley) 역시 최근 몇 년간 연속해 수상 기록을 이어오고 있는 와이너리. 올해 인터내셔널 와인 챌린지에서 피노 누아 로제 브뤼(Pinot Noir Rose Brut)가 트로피를 수상했으며, 특히 이 와이너리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콘월(Cornwall) 지방에 자리해, 꼭 와이너리 투어가 아니더라도 매력적인 풍경으로 여행자들의 발길을 끄는 곳이다. 또 한 곳의 와이너리, 애블돈(Hambledon) 빈야드는 다른 와이너리에 비해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프랑스에서 20년 넘게 샴페인을 양조해온 베테랑 와인메이커와 젊은 프랑스인 와인메이커가 영국 땅에서 떼루아를 가능성을 일궈가고 있다. 레드도, 화이트 와인도 생산하지 않고, 오직 스파클링 와인만 생산하며 샴페인을 능가하는 와인을 만들겠다고 하니 앞으로 출시할 와인들에 더욱 기대를 걸게 된다. 


[런던 근교, 도킹에 자리한 덴비스 와이너리]  

 

런던 근교에서 빈야드 산책을

영국 와이너리를 방문해보면 다른 국가의 와이너리들과 달리 방문객들이 대부분 영국인이라는 재미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관광을 온 여행자들은 세계적인 와인생산국도 아닌 이 나라에서 굳이 와이너리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 까닭일 터. 하지만 런던에 조금 오래 머무는 여행자라면 멀지 않은 곳에 발걸음을 해볼만한 괜찮은 와이너리가 있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어디 내놔도 뒤떨어지지 않는 훌륭한 투어 프로그램을 갖춘 와이너리다. 바로 런던에서 기차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도킹(Dorking)에 자리한 덴비스(Denbies). 도킹 기차역에 내려서 도보로 15분이면 와이너리 건물에 닿을 수 있고 다다르는 동안 양쪽에 펼쳐진 빈야드에서 한가로운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얼마 전 덴비스를 방문해 여름 햇살을 받고 있는 포도나무를 만나고 처음으로 영국의 빈야드를 밟았다. 와이너리에서 방문객들을 위해 하루에 몇 차례씩 운영하는 작은 기차를 타고 경사진 길을 올라가니 포도밭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높은 지대에 다다르고 눈앞에 포도가 영글기 시작한 빈야드의 풍경이 펼쳐진다. 덴비스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은 빈야드를 내려다보며 땅의 특성과 품종에 대한 설명을 듣는 야외 투어와 양조 시설을 둘러보고 테이스팅을 하는 실내 투어, 영상 관람 등이다. 규모에 맞게 레스토랑과 숍도 제대로 갖추고 있으니 런던 근교에서 와인과 함께 한나절을 보내기에 훌륭한 장소다.  

 

영국 와인 생산자들이 기회가 될 때마다 늘 하는 말이 있다. 이번에 와이너리를 방문해 들은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 와인이 영국 최고 와인이라 말하지 않겠다. 영국 전역에 있는 400개가 훨씬 넘는 와이너리들에서 저마다 좋은 와인들을 만들고 있으니, ‘영국 와인’ 자체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는 당부. 그래서 영국 와인을 시음하면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한다. 몰랐던 상대를, 혹은 오해했던 상대의 매력을 발견하는 느낌. 영국에서 역대 최대 수확량을 기록하며 성공적인 해로 평가된 2013년도의 와인을 만나는 것도, 그리고 올해의 수확 결과를 기다리는 일도 모두 기대감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고는 어느새 ‘다시 만나고 싶은 영국 와인’이 되었으므로. 


글_ 안미영


* 와인21닷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Posted by Miyoung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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