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도록 알아온 와인애호가 중 한 명은 와인 선물이 고민스러울 때 종종 와인 대신 와인글라스를 선물하곤 했다. 적당한 가격대에서부터 개인의 취향에 맞는 국가와 포도품종까지 고려해야 하는 와인에 비해, 누구나 이름 그 자체로 고개를 끄덕일만한 좋은 브랜드의 와인글라스가 더 쉽고 적당한 선물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이때 선택은 주로 리델(Riedel)이었다.
그렇다면 좋은 와인글라스의 기준은 무엇일까? 리델 글라스에서 말하는 기준은 우선 공명이 맑으며 내부표면으로 와인이 천천히 흘러내려 와인의 색상을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맛을 인지하는 혀에 정확하게 와인이 닿게 하는 날렵한 테두리(Rim)가 필수적이다. 또한 손의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글라스의 대(Stem)가 길어야 하고, 향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도록 잔이 커야 한다는 것. 지난 11월 25일 저녁,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개최된 리델 글라스 테이스팅의 주인공이 바로 리델 글라스 중에서도 크기로 유명한 비늄 XL(Vinum XL) 시리즈였다. 리델 사에서는 수공예 글라스 외에도 기계로 만들어내는 글라스를 개발해 각 와인에 맞는 모양과 사이즈의 글라스를 사용해야 한다는 인식을 전파해왔다. 비늄 시리즈는 소믈리에 시리즈처럼 기능성 잔이면서도 보다 저렴해, 많은 사람들이 와인의 맛과 향을 제대로 음미하도록 하고 있다. 비늄 XL 시리즈는 이러한 머신메이드 글라스 중에서도 가장 큰 볼을 가지고 있는 글라스이다.
리델 사는 글라스의 장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방식보다는, 글라스 테이스팅(Glass Tasting)을 개최해 시음을 하는 이들이 글라스에 따른 와인의 차이를 직접 느끼도록 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도 여러 번 리델 글라스 테이스팅이 진행되어 왔고, 이를 경험해본 이들의 감흥은 언제나 신기하다는 반응이 우선이었다. 리델 글라스의 어떤 점들이 시음을 한 사람들을 놀랍게 하는가? 글라스의 종류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와인의 풍미를 경험하고 나면, 한가지 와인으로 시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같은 와인이란 사실을 도통 믿기 힘들다고 한다. 이것이 한결같이 놀랍다는 반응이 절로 나오는 이유. 리델 글라스의 진가를 궁금해하던 중, 이번 리델 비늄 XL 글라스 테이스팅에 참석해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테이스팅을 진행한 이는 현재 리델 글라스의 CEO이자 리델 가문의 10대손인 게오르그 리델(Georg J. Riedel)이었다. 기계로 만들어내는 글라스 사업을 개발해 리델 사의 사업을 확장시키고 명품 브랜드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한 인물. 그는 “the key to wine”이라는 말로, 글라스는 와인 시음을 위한 매우 중요한 도구임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피노누아, 시라, 까베르네 소비뇽으로 3가지 비늄 XL 글라스를 앞에 두고 먼저 미네랄 워터를 이용해 테이스팅을 시작했다. 물을 각기 다른 글라스에 따라 마셨는데, 글라스의 모양에 따라 물이 입안에 처음 닿는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질감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고 미세하게 다른 미네랄의 느낌도 경험했다. 다음 순서는 피노누아 와인. 첫번째 피노누아 글라스에서는 풍부한 과일향과 산도감을, 시라 글라스에서는 미네랄과 집중도 높은 향을, 마지막 까베르네 소비뇽 글라스에서는 지나치게 높은 산도감과 거친 미감을 남겼다. 세 글라스의 가장 큰 차이는 아로마였다. 섬세한 아로마의 뉘앙스를 잘 잡아놓는 볼, 그리고 혀의 단맛을 느끼는 부위에 와인이 닿도록 테두리가 디자인된 피노누아 글라스가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이었다. 다음으로 시라를 세 가지 글라스에 따랐는데, 다른 글라스에 비해 시라 글라스에서 매우 크리미한 질감을 보여주며 와인 본연의 장점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은 역시 다른 글라스에 비해 보르도 글라스에서 가장 섬세하고 풍부한 맛과 향이 발현되었다. 게오르그 리델 씨는 와인의 부케가 충분히 발산될 수 있는 큰 볼로 디자인된 이 까베르네 소비뇽 글라스가 메를로와 까베르네 프랑을 마시기에도 적합한 잔이라고 말했다.
세가지 와인을 모두 글라스 테이스팅으로 경험한 뒤에는 음식과의 조화를 확인하기 위해 초컬릿과 함께 하는 테이스팅이 이어졌는데, 까베르네 소비뇽 와인을 각기 다른 글라스에 마시며 초컬릿을 먹어보니 초컬릿 맛 역시 차이가 났다. 적합한 잔에 마신 와인과 함께했을 때 음식의 맛도 조화롭다는 건 이쯤 되면 당연한 차이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 이날 게오르그 리델 씨는 잘못된 글라스 선택의 예로, 플라스틱 컵에 따라진 와인을 가리켰다. 글라스에 따라 와인의 아로마를 거의 느낄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비늄 XL 글라스를 경험하며, 커다란 볼 안에서 와인이 아름답게 흔들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글라스 테이스팅은 와인을 만나는 일이 사람을 만나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다양한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는지가 중요하듯, 각기 다른 와인들을 어떤 도구를 활용에 마시는지가 중요하다. 시음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글라스의 중요성을 확인하며,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이 배가 되는 경험을 했다. 미세한 차이가 커다란 감각의 차이로 연결되는 것. 신기하고도 흥미롭다.


글_ 안미영

* 와인21닷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Posted by Miyoung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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