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향기가 깃든 와인의 인생처럼
- 포도플라자 김 혁 관장과의 만남
여행자의 시선, 혹은 여행자의 자세란 어떤 것일까. 순간에 집착하지 않고 시간의 결을 여유롭게 느끼는 것, 그리고 보다 넓은 시선으로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탐구하는 마음가짐이 아닐는지. 와인 칼럼니스트이자 와인 사진작가이기도 한 포도플라자의 김 혁 관장은 와인 여행에서 느낀 자연의 관대함과 유구한 역사, 그곳에서 만난 찬란한 문화를 책으로 엮어낸다. 물론 와인이 중심이 된 책이다. 하지만 와인이 단순히 맛과 향으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글에서는 유연한 시선이 묻어난다.
김 혁 관장이 와인으로 향한 길을 자신의 인생길로 정한 지는 20년이 넘었다. 그가 걷는 길은 스스로가 직접 보고 느끼고서야 완성되는 길, 그래서 다른 이들과 다른 오직 자신만의 길이다. 이런 신념 덕분에 그의 와인 여정에는 언제나 생생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가 함께 한다. 최근 발간한 <김 혁의 스페인 와인 기행>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스페인 와인만을 주제로 한 책이자, 그의 이름을 걸고 발간한 네 번째 책이다.
얼마 전 포도플라자 뱅가에서 김 혁 관장과 만나 신간 이야기부터 와인과 함께 해온 인생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꿈을 꾸고 길을 떠나며 그것을 뜨겁고도 담담하게, 혹은 세밀하고도 방대하게 기록해낸 이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이어, 이번에는 스페인이네요. <김 혁의 스페인 와인 기행>은 어떻게 기획하게 되셨나요? 우리나라에 아직 스페인 와인 책이 나온 게 없더군요. 좀 평범하더라도 스페인 와인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있는 책을 내고 싶었어요. 스페인에서 중요한 와인 생산지들을 여행하면서 전반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번에도 꽤 오랜 취재 여행을 바탕으로 쓴 책인 것 같습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동안 총 3번에 걸쳐 방문하면서 지역을 나눠 여행했어요. 제 기본적인 원칙이 직접 방문하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포도밭과 양조장을 둘러보며 현지에서 오너나 양조자와 대화를 나누고, 시음을 한 다음에야 그 곳의 가치나 다른 곳과 다른 특수성을 느끼고 글로 표현해내죠.
그럼, 스페인 와인 기행을 하면서 느낀 특수성은 어떤 부분입니까?
문화적인 부분과 역사적인 부분이 와인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참 인상적이더군요. 특히 리오하(Rioja)는 현재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성공을 거뒀지만, 상업화 되기 이전의 소규모 가족적인 보데가(bodega)들이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있는 걸 볼 수 있었어요. 또 500년 세월을 간직한 리베라 델 두에로(Rivera del Duero)의 지하 셀러를 방문했을 땐 부르고뉴의 오래된 셀러를 보는듯한 느낌도 있었죠.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게, 라만차(La Mancha) 지역에는 그와 정반대로 끝이 안보일 정도의 광활한 포도밭이 펼쳐지는 곳도 있어요. 거의 포도나무의 바다와도 같았죠. 스페인은 소박함과 광대함이 공존하고, 특유의 예술 감각과 음식 문화까지 어우러져 와인 여행지로서 매우 매력적인 나라였습니다.
각 지역을 돌며 느낀 감정들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에도 많이 반영되었겠어요. 여행한 순서대로 기록된 것인가요?
책 구성은 음식을 먹는 순서대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스페인 와인 책이니 까바에서 시작해 셰리로 끝나는 거죠. 그 안에서 지역 별로 유명한 곳을 소개하면서 가장 전통적인 와이너리와 현대적인 와이너리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와인 기행 때, 현지에서 올드 빈티지 와인을 시음하고 와인이 간직한 오랜 세월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셨죠. 스페인에서도 그런 경험이 가능했나요?
네, 이번에도 그런 기회가 있었어요. 리오하에서는 1970년대 중반, 토로(Toro)에서는 1960년대 빈티지를 시음해봤습니다. 또 제가 오래된 포도나무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 100년에서 120년 정도 된 나무들을 봤어요. 포도나무의 껍질에서 세월이 느껴져, 햇살이 비출 때면 절로 카메라를 갖다 대게 되더군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리베라 델 두에로는 오랜 전통이 느껴져서 특히 기억에 남아요. 또 가장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안달루시아 지방을 빼놓을 수 없는데, 바로 셰리(Sherry) 때문입니다. 현지에서 솔레라 시스템(Solera System)의 작업 과정도 직접 볼 수 있었어요. 셰리는 스페인을 ‘와인’으로 세계에 각인시킨 존재이고 숙성 능력도 굉장해요. 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것 자체가 대단하죠.
같은 곳을 가서 같은 대상을 봐도 누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감상은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관장님의 와인 기행에는 문화적인 요소들이 꽤 포함된 것 같은데요.
제가 그림을 좋아해요. 와인 사진을 처음 찍기 시작했을 때도 그림을 보면서 구도에 대한 생각을 했죠. 스페인 여행을 하며 틈틈이 피카소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했어요. 책에서도 와인 이야기를 하지만 좀 더 다양하고 재미있게 문화적인 접근을 하려고 해요. 사실 와인이란 것 자체가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존재잖아요.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인간과 자연이 만나 탄생해서 전 세계로 퍼진 대단한 아이템이죠. 와인을 보면서 여러 가지 소재를 떠올리고 인생의 흐름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와인 책을 냈던 때가 2000년이고, 이후 4년마다 책이 나오고 있어요. 첫 번째 책 <김 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이 좋은 출발이 된 것 같은데요?
당시 지면 매체에 와인 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제 글을 보고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안이 왔어요. ‘세계 와인’을 주제로 하자는 것이었는데, 제가 가보지 않은 곳은 쓰지 않겠다는 고집을 밀어붙였어요. 책에 유명인의 추천서를 실어야 한다는 의견도 거부했고, 제 이름을 걸고 책 제목을 짓겠다고 했는데 그게 다 받아들여졌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낸 책에 모두 제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와인에 처음 빠져들었던 건,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1987년이니 20년도 더 전 이야기네요. 프랑스에 지질학을 공부하러 갔을 때였어요. 그 곳에서 발자크를 공부하던 스위스 친구가 어느 날 제게 샤토 드 보카스텔(Chateau de Beaucastel)을 가지고 왔는데 그걸 마시고 ‘와인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구나’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91년부터 에어프랑스에서 케이터링 매니저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와인 공부를 했어요. 오스피스 드 본(Hospice de Beaune)에 참석 차 부르고뉴에 갔다가 샤토 드 포마르(Chateau de Pommard)를 방문해 지하 셀러를 걸었던 경험과 그 때 받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네요. 양쪽에 오크통이 늘어선 컴컴한 공간을 걸으며, 와인에는 내가 인생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문화적, 철학적, 예술적 요소들이 다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제 인생의 아이템을 와인으로 정했지요. 그리곤 그 다음부턴 와인 여행만 다닙니다.
지금 돌아보면 지질학 전공이라는 것도 운명적인 것 같네요.
정말 그래요. 지질학을 전공하기 전까지 와인에 대해서 전혀 몰랐지만 와인을 공부하다 보니 지질학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또 케이터링 매니저 시절에는 프랑스 문화에 젖어서 자연스럽게 와인 테이스팅을 많이 하게 되었고, 인생길이 자연스럽게 와인으로 연결된 것 같아요. 한 길로 가다가 또 다른 길이 중첩되고, 또다시 나아가고…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이어져왔죠.
포도플라자의 관장을 맡게 된 것도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나요?
2004년 봄 즈음부터는 와인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나라셀라의 자문을 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 포도플라자 건립이 추진 중이었는데, 건물 자체가 와인과 음식을 주제로 한 복합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구상하고 있었죠. 그 때 디렉터 자리를 제안 받아, 오픈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 자리를 맡아왔어요.
오랜 세월 와인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한국의 와인 시장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느끼신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사람에 대한 부분은 어떤가요. 20년 전과 비교해보면 지금은 우리나라에 와인전문가라 부를만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아졌죠.
‘소믈리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실질적인 경험을 많이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소믈리에들은 이론적인 부분을 많이 공부하지만 거기에 다양한 경험이 더해져야 해요. 그게 소위 말하는 ‘내공’인데, 깊이 있는 접근을 하고 나면 언제든 그것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요. 와인을 알수록 겸손한 자세로, 개인적인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죠.
와인을 평가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와인을 마시면서 터득한 저만의 방식으로 와인을 평가해요. 간단하죠. 향과 맛, 그리고 바디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어느 정도의 밸런스를 가지고 있는 와인인가에 대한 판단을 합니다. 저는 기술적으로 향을 분석하는 데 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그건 양조자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가장 큰 기준은 ‘밸런스’로군요.
그렇죠. 자연스러운 균형감 같은 거예요. 저렴한 와인 중에서도 밸런스가 좋은 와인들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밸런스에 따라 숙성 능력도 달라지고, 음식 매칭도 달라지죠. 저만의 기준이지만 외국의 평론가들과 이야기해볼 때 비슷한 기준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와인 강의를 하실 때, 특히 초보자들에게 가장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초보자 강의에서는 와인 테이스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와인의 일생을 이야기해요. 포도가 생산되는 가장 첫 순간부터 와인이 테이블에 올라 음식과 만나기까지 전 과정을 포함해서 기본적인 설명을 합니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숲을 본 뒤에 나무를 보는 거죠.
‘와인’이라는 인생의 뚜렷한 테마를 가지고 지금까지 탐구해오셨는데, 앞으로의 길을 예견해본다면 어떨까요?
무엇이든 한 가지를 계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아이템을 잘 잡아야 하고 좋은 에너지가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에너지가 생기게 하는 게 곧 열정이죠. 와인과 관련된 저의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와인 책을 열 권 정도 남기겠다는 거예요. 책을 내는 기간이 몇 년씩 걸리고 있지만, 처음 책을 쓰면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꿈입니다. 와인에 대한 열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해나가고 싶어요.
글_ 안미영
* 와인21닷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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