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혹은 ‘명품’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 단어들은 그 의미만큼이나 귀한 표현으로, 진정한 일인자에게 쓰여야 합당하겠지만 실상은 너무도 흔히 쓰는 수식어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가 최고임을 자청하고 그 단어를 쉽게 사용하지만 가끔 의문이 든다. 영예로운 표현일수록 진정으로 선두에 서있는 대상에게만 사용해야 그 가치가 더욱 빛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스페인의 베가 시실리아(Vega Sicilia) 와이너리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겠다. 베가 시실리아는 의심의 여지없이 명실상부한 스페인 최고의 와인 명가이며, 그들이 생산하는 와인들이 이를 증명한다. 베가 시실리아를 두고 ‘스페인의 로마네 꽁띠’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도 프랑스 고급 와인에 비견할 만큼 진귀한 와인을 생산하는 전설적인 와이너리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베가 시실리아의 현 오너인 파블로 알바레즈(Pablo Alvarez) 씨가 한국을 방문해 베가 시실리아의 와인들을 함께 시음하는 자리를 가졌다. 알바레즈 가문은 1982년 베가 시실리아를 인수하고, 1993년에는 헝가리의 토카이(Tokay) 지역에 포도밭을 사들이는 등 현재 총 5개의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 파블로 알바레즈 씨는 인수를 결심할 때 가장 명성이 있고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를 선택했다고 한다. 5개 와이너리의 공통점은 포도밭을 가장 중시하며 모두 직접 재배한 포도로 와인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베가 시실리아의 남다른 신념
1864년 그 역사가 시작된 베가 시실리아는 와인 양조 방법에서도 몇 가지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먼저 포도 수확 시 전통적인 수작업을 고수한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반드시 7년 이상 된 포도나무로부터 포도알을 하나하나 선별해 수확한다. 700~800m 고도에 자리잡은 총 200헥타르의 포도밭에서 템프라니요, 까베르네 쇼비뇽, 말벡, 메를로 네 가지 품종을 따로 재배하며, 헥타르 별로 포도수확량을 제한하고 있다. 오크통 제작 방식 또한 특별하다. 한두 해 전에 미리 수입한 떡갈나무를 건조시켜 4월부터 10월까지는 오크통을 만드는 나무토막을 준비하고,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자체적으로 오크통을 제작한다. 오크통을 굳이 10월 이후에 만드는 이유는 수확이 끝난 뒤 그 해의 빈티지 특성에 맞춰 통을 제작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와인의 병입 숙성 기간이 긴 만큼, 코르크의 퀄리티도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미리 주문한 코르크를 자체 실험을 거쳐 품질을 확인한 뒤에야 베가 시실리아 마크를 찍는다. 앞으로 30여 년 후에는 코르크 마개를 와이너리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 위해, 10여 년 전에 코르크 참나무 3만 그루를 심기도 했다. 150여 년간 이어온 와이너리의 남다른 신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강인함과 순수함을 갖춘 플래그쉽 와인, 우니코
베가 시실리아의 플래그쉽(Flagship) 와인 우니코는 1981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비 결혼 연회에 사용되었고, 한국에서는 배우 장동건 씨가 고소영 씨에게 프로포즈할 때 사용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니코는 포도 품질이 좋은 해에만 극히 제한적인 양을 생산한다. 그래서 의리를 중시하는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 ‘돈이 아닌 우정으로 살 수 있는 와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시음 적기가 될 때까지 보관한 뒤 출시한다’는 원칙으로 오크통에서 10년 이상의 긴 숙성 기간을 거치는 것으로 유명하며, 우니코가 처음 출시된 1991년에 내놓은 것도 1968년과 1982년 두 가지 빈티지였다. 출시 이후 20년에서 40년 정도 숙성이 가능하고 100년까지도 보관이 가능하며, 장기 보관 후에도 강하고 순수한 과일 향을 보여주는 놀라운 와인이다.
베가 시실리아는 자국 내 소비보다 수출용 와인이 더 많은 여러 와이너리들과는 대조적으로, 많은 양을 수출하진 않는다. 스페인 내에서도 고객들이 긴 대기 리스트를 이루고 있고 심지어 스페인 국왕조차도 와인 출시를 기다리는 상황이기 때문. 총 생산량에서 약 17%만이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파블로 알바레즈 씨와 함께 시음한 와인은 오레무스 만돌라스(Tokaji Oremus, Oremus Mandolas), 알리온(Vega Sicilia, Alion), 우니코(Vega Sicilia, Unico), 오레무스 아쑤(Tokaji Oremus, Oremus Aszu) 네 가지였다. 알바레즈 가문이 왜 선택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투자하고 발전시켜가고 있는지 각 와인마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함께 한 시간이었다.
토카이 오레무스, 오레무스 만돌라스(Tokaji Oremus, Oremus Mandolas 2011)
헝가리의 토카이 지역은 17세기까지 큰 명성을 누렸으나 이후 정부의 간섭 등으로 품질이 떨어져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1993년 베가 시실리아에서 토카이 지역에 포도밭을 사들이고 토카이 오레무스(Tokaji Oremus)를 설립한 뒤 예전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고 토카이를 부흥시키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오레무스 만돌라스는 푸르민트(Furmint) 100%로 생산한 와인. 푸르민트는 토카이의 가장 중요한 품종이며, 전체 포도밭 중 90%에서 푸르민트를 재배하고 있다. 다양한 포도 품종으로 화이트 와인을 실험하던 베가 시실리아가 헝가리의 기후와 토양에서 드라이 화이트 와인의 생산 가능성을 발견했고, 1993년 개발에 착수해 1999년 첫 빈티지를 내놓은 것이다. 현재는 다른 와이너리에서도 시도하고 있지만 푸르민트 품종으로 드라이 와인을 만든 것은 베가 시실리아가 처음이다. 푸르민트가 갖춘 훌륭한 산도가 드라이 와인에서도 잘 발현되었고, 화산토의 영향으로 부드러운 미네랄 느낌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꽃의 향긋한 아로마와 적절한 무게감을 갖춘 와인으로 향후 6~7년 정도 숙성 가능하다.
* 한국에서는 현재 2007, 2009, 2010년 빈티지가 유통되고 있다.
베가 시실리아, 알리온(Vega Sicilia, Alion 2009)
틴토 피노(Tinto Fino) 100%로 생산된 알리온은 베가 시실리아에서 1990년대 초반 새롭게 시작한 프로젝트이다. 리베라 델 두에로(Ribera Del Duero)는 4월에 서리가 내리거나 7월에 폭우가 쏟아지는 등 기후가 변덕스러운 편인데, 베가 시실리아에서는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기후가 좋지 않은 해에는 생산량을 대폭 축소하기도 한다. 따라서 매년 기후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지며, 최근에는 2009년이 가장 많이 생산된 해이다. 프렌치 오크에서 14개월 숙성시켜 출시하는 알리온은 신선한 과실 향이 살아있으며 마시기 편한 스타일이면서도 생생한 탄닌이 느껴진다. 농밀한 질감과 풍부한 향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와인이다.
* 한국에서는 현재 2008년 빈티지가 유통되고 있다.
베가 시실리아, 우니코(Vega Sicilia, Unico 2003)
우니코는 베가 시실리아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와인이다. 프랑스의 경우, 명성을 자랑하는 유수의 와이너리들이 서로가 모두 최고라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스페인에서는 단연 우니코를 최고의 와인으로 꼽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숙성시켜 당장 마실 수 있는 상태에서 출시하지만 이후에도 40년 정도는 충분히 숙성 가능하며, 작황이 좋은 해에만 생산하기 때문에 10년 중에서 2, 3년 정도는 아예 생산하지 않는 해가 나오기도 한다. 틴토 피노 90%와 까베르네 쇼비뇽 10%로 만들어졌으며 복합적이고 풍부한 아로마 사이에서 타바코와 나무 향이 인상적이다. 매우 마시기 좋은 스타일이면서도 고고한 우아함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신비롭기까지 한 와인이었다.
* 한국에서는 현재 2000년 빈티지가 유통되고 있다.
토카이 오레무스, 오레무스 아쑤(Tokaji Oremus, Oremus Aszu 5Puttonyos 2005)
산도와 당도가 뛰어난 균형을 보여주는 디저트 와인이다. 보트리티스(Botrytis) 영향을 받은 각각의 포도알을 손수확해 재배하며 푸르민트 70%, 하르쉬레벨류(Harslevelu) 25%, 무스캇(Muscat) 5%로 생산된다. 짙은 황금빛 컬러에 건포도와 살구 등 말린 과일의 풍미와 카라멜의 아로마가 생생하게 올라오고, 깔끔하고 신선한 끝 맛에 이어지는 달콤한 여운이 힘있게 오래도록 지속된다.
* 한국에서는 현재 2002, 2003년 빈티지가 유통되고 있다.
글_ 안미영
* 와인21닷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