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명성을 이어간다는 것
- 가이아 가야와의 만남
가이아 가야(Gaia Gaja)의 방한 소식에,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하는 시음 디너가 개최된다는 소식에 와인애호가들과 와인전문가들은 기대감에 술렁였다. 가을에 접어들자 기다렸다는 듯 연이어 개최되는 많은 와인 행사들 중에서도 에노테카 코리아에서 주최한 가야 와인 메이커스 디너는 열 일 제쳐두고서라도 달려갈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괜한 호들갑이 아니다. 이유는 ‘가야’라는 이 특별한 고유명사만으로 족할 것이다.
이탈리아 와인의 거장, 안젤로 가야(Angelo Gaja)의 장녀이자 현재 아버지와 함께 와이너리 경영을 맡고 있는 가이아 가야는 지난 2009년 와이너리 설립 150주년 기념행사로 방한한 이후 3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앉은 그녀는 자연스레 드러나는 긍정적인 에너지에서 아버지 안젤로 가야를 떠올리게 했다. 이탈리아 최고 와이너리로 손꼽히는 가야의 젊은 경영자가 말하는 그들의 전통과 가치는 어떤 것일까. 진중하고도 열정적인 그녀의 답변에서 지금까지 가야가 걸어온 도전의 길은 물론이며, 가야의 미래까지 읽어볼 수 있었다.
깊은 늦가을에 한국을 다시 찾았네요. 현재 가이아 가야 씨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시장을 함께 책임지고 있는데, 해외 시장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보통 한달 중에서 3주는 이탈리아에서 근무하고 나머지 1주는 해외 출장을 다니고 있어요. 그 마지막 한 주가 해외 시장을 돌아보면서 가야 와인에 대한 인상을 심어주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중요한 시간이죠. 이번에 제가 3년만에 다시 왔지만 그 사이 저희 아버지가 방한해 한국의 와인전문가들, 애호가들과 만남을 가지셨어요. 한국은 세계 각국의 와인을 수입하고 있고 이탈리아 와인도 다양하게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가능성이 많은 시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들은 어떤 방식으로 와이너리 경영에 참여하고 있나요?
아버지가 CEO이고, 어머니가 회계를 담당하시죠. 제가 총괄 관리를 하고 여동생이 제품 개발에 참여하고 있어요. 남동생은 아직 학생이죠. 우리는 하루에 8시간씩 함께 근무를 하고 있고, 모든 핵심적인 전략은 가족들이 같이 결정해요.
현재 5대째 와이너리를 이어가고 있는데,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세대가 바뀌면서 변하는 부분이 있을 테죠. 가야는 이미 너무나 훌륭한 명성을 얻고 있는 와이너리이기 때문에 이런 가업을 잇는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바로 지금처럼 세대가 바뀌는 시점이 상당히 중요한 변화의 시기라고 생각해요. 물론 부모님이 와이너리 일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세대가 바뀐다 해도 큰 변화보다는 기존 가야 와이너리에 우리 세대의 색깔이 더해지는 정도일 거예요. 부담감은 물론 있어요. 작년에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할 정도였죠.(웃음) 책임이 막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일에 매진했습니다.
가야 와인에서 놓치지 않고 지켜가야 할 가치는 어떤 것일까요? 실제적으로는 무엇에 가장 큰 무게중심을 두고 있나요?
제가 하고 있는 일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땅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우리의 포도만으로 와인을 탄생시킨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현재 갖고 있는 것을 잘 지켜가는 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시작점이나 기본을 잘 지켜간다면 부수적인 것들은 모두 잘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생산된 포도를 양조장으로 옮겼을 때, 땅에서부터 포도에게로 온 좋은 부분들을 양조장에서 망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양조 과정에서 떼루아의 정체성을 오롯이 표현해내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와이너리의 역사가 긴 만큼, 가야만의 노하우도 많이 축적되어 있을 것 같아요.
‘사람’을 통한 노하우가 많다는 게 우리의 큰 자랑이에요. 가야 가문만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팀 전체가 일생을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2대째 부모님을 이어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있고, 빈야드에서 근무하는 이들 역시 하루하루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일해와서 누구보다도 포도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죠. 이런 부분이 가야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가이아 가야 씨는 바르바레스코(Barbaresco)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와인이라는 것이 인생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 존재였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가족 사업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죠. 와인은 단순히 맛있어서 마신다거나 상품으로서 생산하는 음료라기보다는 그 이상의 특별한 가치가 있어요. 저는 와인이 ‘메모리’와 같다고 생각해요. 사람의 머리나, 컴퓨터에 저장하듯이 기억을 담고 있는 거죠. 그런데 와인에는 포도가 자란 땅의 역사와 수많은 변화가 모두 담겨있기 때문에 사람이나 컴퓨터의 메모리를 뛰어넘는다고 할 수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하고 아름답게 변하기도 하고, 마침내 생명을 다하는 주기가 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죠.
아버지 안젤로 가야 씨로부터는 어떤 영감을 받았나요?
정말 놀랍고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아요. 매일매일 영감을 받는다고 말할 정도로 말이죠. 매사에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나, 일을 할 때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 등 업무에서도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는 와인 생산 과정에서 아니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을 때는 부담을 많이 느낄 만한 상황에서도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곤 합니다. 참 용감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계신 분이에요.
안젤로 가야 씨의 그런 분명한 신념이 지금의 가야를 있게 한 큰 요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네, 가야만의 일관성과도 연결되죠. 시장이 원한다고 해서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확고한 기준으로 그 지역에 적합하고 퀄리티가 만족스러운 와인만을 꾸준히 만들어온 것이 가장 큰 요인이 될 거예요. 생각의 중심을 잃지 않았던 거죠.
앞으로 더 주력하고 싶은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앞으로 저와 제 동생이 직접 팀을 꾸려가야 하는데, 새로운 것을 만든다기보다는 바르바레스코, 몬탈치노, 볼게리 지역 등 현재 소유하고 있는 포도원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파악해나가는 것을 첫 번째 임무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포도 품종 개발이나 새로운 블렌딩 시도 등 더 뛰어난 퀄리티의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할 예정입니다.
인터뷰 후 개최된 디너에서 가이아 가야는 지금까지 가야 가문의 선조들이 이뤄온 혁신의 역사를 설명했다. 가야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명함과 포도원에서 촬영한 빛 바랜 가족사진 등 오랜 자료들과 함께, 고급 와인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기에 프리미엄 와인 생산의 터전을 일구며 바르바레스코의 발전을 이끌었던 도전의 일화들이 이어졌다.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야 와인에는 떼루아와 사람의 이야기가 깃들어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와인이 간직한 오랜 ‘메모리’를 언급했던 가이아 가야의 말이 더욱 깊이 와 닿는다. 우리가 와인을 매개로 그 소중한 메모리를 나누고 교감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와인이란 존재가 거쳐온 세월과 문화를 제대로 만나는 방법이 아닐는지.
글_ 안미영
* 와인21닷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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