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존재, 와인  

- 나라셀라㈜ 성호 이사와의 만남

 

와인을 접하고 난 뒤 인생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이것은 인생의 어떤 극적인 터닝포인트를 의미하는 말일까. 우연한 기회에 마시게 된 와인과의 운명 같은 첫만남이나, 관심과 열정으로 지식을 쌓고 시야가 넓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로 인해 맺어진 인연까지 함축하고 있는 자기고백이 아닐는지.

나라셀라㈜의 신성호 이사는 대기업 기획팀에서 근무하던 중, 와인에 매료되어 와인업계로 인생의 행로를 바꾼 사람이다. 오래 그를 알아온 사람들은 그를 두고와인계의 신사라고 말하기도, 또 와인업계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고 있는 많은 이들은 그를멘토롤 모델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 회사에서 12년 동안 근무하며 국내외 굵직한 행사를 진행해온 신성호 이사의 행보는 단연 독보적이다. 이번에 그의 첫 번째 와인 도서 <와인 천재가 된 홍대리> 출간 소식을 듣고 기대했던 것도 지금까지 시중에 나온 와인 도서와 다른 특별함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나게 된 그의 책은 와인초보자들에게 재미있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내용으로, 특이하게도 소설 형식을 취하면서 효과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사실홍대리 시리즈는 이미 많이 알려진 자기계발서다. 신성호 이사는 기존 홍대리 시리즈에서 이어오던 스토리의 골격 안에 와인 이야기를 적절히 녹여냈다. “와인업계에 몸담은 지 10년이 넘어가니, 이 즈음 책을 한번 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던 중 출판사로부터 책 발간 제안을 받았는데 제가 생각해온 부분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애초에 전문서에 대한 생각은 없었고, 와인수입회사에 근무하며 강의를 해온 저의 경험과 장점을 살려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죠. 이 책은 독자들의 눈을 넓혀주고 와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주는 책입니다.” 그는 백화점 와인매장 점장으로서 다양한 고객들을 직접 만나본 경험이나, 오랜 시간 여러 청중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온 노하우까지 고스란히 담았다. 주인공 홍대리가 과제를 하나씩 해나가는 과정은 실제로 와인을 배우는 사람들이 특징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한 단계 장벽을 넘어서며 와인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는 과정과도 같다.

다른 와인 서적과 비교했을 때 <와인 천재가 된 홍대리>는 확실히친절한책이다. 와인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루며, 와인을 보다 쉽게 접하고 관심을 갖게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을 완독한 독자들은 이제 음용의 단계로 넘어가, 한 자리에서 차별성 있는 여러 와인들을 비교해보는 과정을 거쳤으면 좋겠습니다. 특징적인 향에 매달리지 말고 크게 풍미의 계열을 읽는 연습을 하면 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죠. 이 책에서는 포도 풍미에 대한 계열과 품종 정보, 기타 와인상식을 다루고 있는데, 2편을 낸다면 원산지의 특징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는 실용적인 관점에서는 와인을 배우는 것이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말을 하기 위해 외국어를 배우듯 와인 역시 마시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외국어를 배울 때 일련의 과정을 거쳐 능숙해지듯 와인에서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와인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모두 책 속 주인공과 엇비슷한 일들을 겪지 않았을까. 어쩌면 신성호 이사 역시 과거에는 홍대리의 모습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12년 전 와인과 인연을 맺은 당시를한국에 와인 문화가 꽃피려던 시기라고 표현한다. 와인동호회 회장을 맡아 동호회를 운영하고 와인 공부를 하면서도, 와인을으로 삼기까지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테다. “지금 돌아보면 참 맹목적이고 용감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평생 직장보다는 평생의 일을 원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죠. 와인을 마실수록 그것이 곧 지속적인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와인은 술이면서도 문화적인 코드와 접목이 되기 때문에 와인애호가들 중에는 문화탐식가가 많죠. 그래서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잦았고 공부해야 할 것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와인은 문화와 함께 이해해야 하는 복합적인 콘텐츠이므로, 제가 아주 오랫동안 이 주제에 빠져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2001, 그는 와인업으로의 전업을 결심한 뒤 나라셀라㈜에 입사했고, 이후에는 와인 마케팅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며 와인업계에서 이례적으로 긴 마케팅 경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의 최초 공식 방한을 비롯해 여러 와인 행사의 통역을 했던 경험이나 와인전문가로 강의를 해온 경력도 상당한데, 그는 특히 와인업계에 마케팅을 담당하는 후배들이 많이 생겼고 그들에게 자신이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물론, 그간의 세월이 순탄한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와인이 전체 주류 시장에서는 매우 작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규모의 경제가 따르지 못해 어려울 때도 많았다고 한다. 오직 노력과 임기응변만으로 해내야 하는 일이나, 육체적으로 힘들 정도로 인력이 부족했던 상황도 있었다. 개인적인 시간을 포기하고 일에 매달려온 세월에는 한국에서 대표적인 칠레 와인 브랜드로 알려진 몬테스(Montes)와 얽힌 이야기도 있다. 2000년대 중반 칠레 와인이 붐을 일으키던 시기에 그는 몬테스의 브랜드 매니저를 맡고 있었고, 타 브랜드의 강한 도전을 받는 상황에 맞서 몬테스의 밤을 기획하게 되었다.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결과 몬테스 측의 지원과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 20041회를 성공적으로 치렀으며 이후 매해 개최하는 행사로 자리잡았다. ‘몬테스의 밤이 시작된 이후 몬테스는 더욱 성공가도에 올랐고, 지금 이 행사는 수입사가 주최하는 행사 중에서 매우 존재감이 큰 와인 행사로 꼽힌다.

그렇다면 신성호 이사가 말하는 나라셀라㈜의 미래는 어떨까.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장점을 더 발전시켜나가고, 고객 접점을 다양하게 마련하려고 합니다. 나라셀라㈜는 신세계 와인, 특히 캘리포니아 고급 와인의 선구자로서 빛나는 라인업을 갖추고 있는데, 현재의 클래식한 와인에 더해 향후 주목할만한 와인도 보강하려고 해요. 그 밖에도 방대한 와인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는 만큼 여러 국가의 숨어있는 좋은 와인들을 제대로 소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죠. 또 직접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해 고객접점을 늘릴 계획도 있어요. 가격 이외의 요소로도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노력으로 더 많은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가 와인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첫 번째 와인 책을 낸 현재, 회사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와인이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마다 와인에 빠져든 계기가 여러 가지이듯, 와인을 평가하는 기준도 다를 수 있고, 동시에 와인을 사랑하는 방식도 다양할 테니까. 신성호 이사는 좋은 와인의 기준을정체성에 두고 있었다. “전문가들의 테이스팅은 완벽에 대한 기준을 세워놓고 감점을 해나가는 방식이죠. 하지만 저는 와인의 유형을 감안한 평가를 하고 싶어요. 와인 고유의 스타일에 충실한 것이 중요한데, 그것이 곧 떼루아를 표현하는 겁니다.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면서도 가격 거품이 없는 와인이라면 좋겠죠. 어느 정도 상업적인 기준점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색깔과 개성을 잘 구현한 와인이라는 그의 기준은 매우 당연하듯 하면서도, 와인을 마실 때 쉽게 간과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성호 이사를 만나기 전, 그가 와인에서 찾은 키워드가 인생의 여유혹은기다림일 것이란 짐작을 했다. 그의 책 속 홍대리가 차근차근 와인에 접근하며 알아가듯, 좋은 와인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에도 똑같이 기다림의 미학이 적용되는 게 아닐지. 이것이 그가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했다. “촌각을 다투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빠르고 능률적인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생략할 수 없는 과정이라는 것이 있는데, 와인에서 그런 부분을 배울 수 있어요. 숙성 과정을 건너뛰면 와인의 아름다운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와인은 양조자의 손, 유통업자의 손등 여러 손을 거치는 데, 와인의 잠재력이 충분히 발현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시간의 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 힘들고 답답하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있는 법이죠. 약식이 쉽게 통용되는 세상에 와인이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기다림의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신성호 이사가 와인에서 깨달은 가치는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을 환기시킬 만큼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이다. 그가 알리는 와인이 편하고 재미있게 느껴지고, 그의 강의가 생동감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진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_ 안미영

 

* 와인21닷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Posted by Miyoung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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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향기가 깃든 와인의 인생처럼
 - 포도플라자 김 혁 관장과의 만남

 

여행자의 시선, 혹은 여행자의 자세란 어떤 것일까. 순간에 집착하지 않고 시간의 결을 여유롭게 느끼는 것, 그리고 보다 넓은 시선으로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탐구하는 마음가짐이 아닐는지. 와인 칼럼니스트이자 와인 사진작가이기도 한 포도플라자의 김 혁 관장은 와인 여행에서 느낀 자연의 관대함과 유구한 역사, 그곳에서 만난 찬란한 문화를 책으로 엮어낸다. 물론 와인이 중심이 된 책이다. 하지만 와인이 단순히 맛과 향으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글에서는 유연한 시선이 묻어난다.
김 혁 관장이 와인으로 향한 길을 자신의 인생길로 정한 지는 20년이 넘었다. 그가 걷는 길은 스스로가 직접 보고 느끼고서야 완성되는 길, 그래서 다른 이들과 다른 오직 자신만의 길이다. 이런 신념 덕분에 그의 와인 여정에는 언제나 생생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가 함께 한다. 최근 발간한 <김 혁의 스페인 와인 기행>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스페인 와인만을 주제로 한 책이자, 그의 이름을 걸고 발간한 네 번째 책이다.
얼마 전 포도플라자 뱅가에서 김 혁 관장과 만나 신간 이야기부터 와인과 함께 해온 인생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꿈을 꾸고 길을 떠나며 그것을 뜨겁고도 담담하게, 혹은 세밀하고도 방대하게 기록해낸 이와의 인터뷰를 전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이어, 이번에는 스페인이네요. <김 혁의 스페인 와인 기행>은 어떻게 기획하게 되셨나요? 우리나라에 아직 스페인 와인 책이 나온 게 없더군요. 좀 평범하더라도 스페인 와인에 대한 기준이 될 수 있는 책을 내고 싶었어요. 스페인에서 중요한 와인 생산지들을 여행하면서 전반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번에도 꽤 오랜 취재 여행을 바탕으로 쓴 책인 것 같습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동안 총 3번에 걸쳐 방문하면서 지역을 나눠 여행했어요. 제 기본적인 원칙이 직접 방문하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포도밭과 양조장을 둘러보며 현지에서 오너나 양조자와 대화를 나누고, 시음을 한 다음에야 그 곳의 가치나 다른 곳과 다른 특수성을 느끼고 글로 표현해내죠.


그럼, 스페인 와인 기행을 하면서 느낀 특수성은 어떤 부분입니까?
문화적인 부분과 역사적인 부분이 와인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는 점에서 참 인상적이더군요. 특히 리오하(Rioja)는 현재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성공을 거뒀지만, 상업화 되기 이전의 소규모 가족적인 보데가(bodega)들이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있는 걸 볼 수 있었어요. 또 500년 세월을 간직한 리베라 델 두에로(Rivera del Duero)의 지하 셀러를 방문했을 땐 부르고뉴의 오래된 셀러를 보는듯한 느낌도 있었죠.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게, 라만차(La Mancha) 지역에는 그와 정반대로 끝이 안보일 정도의 광활한 포도밭이 펼쳐지는 곳도 있어요. 거의 포도나무의 바다와도 같았죠. 스페인은 소박함과 광대함이 공존하고, 특유의 예술 감각과 음식 문화까지 어우러져 와인 여행지로서 매우 매력적인 나라였습니다.


각 지역을 돌며 느낀 감정들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에도 많이 반영되었겠어요. 여행한 순서대로 기록된 것인가요?
책 구성은 음식을 먹는 순서대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스페인 와인 책이니 까바에서 시작해 셰리로 끝나는 거죠. 그 안에서 지역 별로 유명한 곳을 소개하면서 가장 전통적인 와이너리와 현대적인 와이너리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와인 기행 때, 현지에서 올드 빈티지 와인을 시음하고 와인이 간직한 오랜 세월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셨죠. 스페인에서도 그런 경험이 가능했나요?
네, 이번에도 그런 기회가 있었어요. 리오하에서는 1970년대 중반, 토로(Toro)에서는 1960년대 빈티지를 시음해봤습니다. 또 제가 오래된 포도나무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 100년에서 120년 정도 된 나무들을 봤어요. 포도나무의 껍질에서 세월이 느껴져, 햇살이 비출 때면 절로 카메라를 갖다 대게 되더군요.


특히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리베라 델 두에로는 오랜 전통이 느껴져서 특히 기억에 남아요. 또 가장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안달루시아 지방을 빼놓을 수 없는데, 바로 셰리(Sherry) 때문입니다. 현지에서 솔레라 시스템(Solera System)의 작업 과정도 직접 볼 수 있었어요. 셰리는 스페인을 ‘와인’으로 세계에 각인시킨 존재이고 숙성 능력도 굉장해요. 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것 자체가 대단하죠.


같은 곳을 가서 같은 대상을 봐도 누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감상은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관장님의 와인 기행에는 문화적인 요소들이 꽤 포함된 것 같은데요.
제가 그림을 좋아해요. 와인 사진을 처음 찍기 시작했을 때도 그림을 보면서 구도에 대한 생각을 했죠. 스페인 여행을 하며 틈틈이 피카소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했어요. 책에서도 와인 이야기를 하지만 좀 더 다양하고 재미있게 문화적인 접근을 하려고 해요. 사실 와인이란 것 자체가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존재잖아요.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인간과 자연이 만나 탄생해서 전 세계로 퍼진 대단한 아이템이죠. 와인을 보면서 여러 가지 소재를 떠올리고 인생의 흐름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와인 책을 냈던 때가 2000년이고, 이후 4년마다 책이 나오고 있어요. 첫 번째 책 <김 혁의 프랑스 와인 기행>이 좋은 출발이 된 것 같은데요?
당시 지면 매체에 와인 칼럼을 쓰고 있었는데, 제 글을 보고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안이 왔어요. ‘세계 와인’을 주제로 하자는 것이었는데, 제가 가보지 않은 곳은 쓰지 않겠다는 고집을 밀어붙였어요. 책에 유명인의 추천서를 실어야 한다는 의견도 거부했고, 제 이름을 걸고 책 제목을 짓겠다고 했는데 그게 다 받아들여졌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낸 책에 모두 제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와인에 처음 빠져들었던 건,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1987년이니 20년도 더 전 이야기네요. 프랑스에 지질학을 공부하러 갔을 때였어요. 그 곳에서 발자크를 공부하던 스위스 친구가 어느 날 제게 샤토 드 보카스텔(Chateau de Beaucastel)을 가지고 왔는데 그걸 마시고 ‘와인이 이렇게 맛있을 수 있구나’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91년부터 에어프랑스에서 케이터링 매니저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으로 와인 공부를 했어요. 오스피스 드 본(Hospice de Beaune)에 참석 차 부르고뉴에 갔다가 샤토 드 포마르(Chateau de Pommard)를 방문해 지하 셀러를 걸었던 경험과 그 때 받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네요. 양쪽에 오크통이 늘어선 컴컴한 공간을 걸으며, 와인에는 내가 인생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문화적, 철학적, 예술적 요소들이 다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제 인생의 아이템을 와인으로 정했지요. 그리곤 그 다음부턴 와인 여행만 다닙니다. 


지금 돌아보면 지질학 전공이라는 것도 운명적인 것 같네요.
정말 그래요. 지질학을 전공하기 전까지 와인에 대해서 전혀 몰랐지만 와인을 공부하다 보니 지질학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또 케이터링 매니저 시절에는 프랑스 문화에 젖어서 자연스럽게 와인 테이스팅을 많이 하게 되었고, 인생길이 자연스럽게 와인으로 연결된 것 같아요. 한 길로 가다가 또 다른 길이 중첩되고, 또다시 나아가고…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이어져왔죠.


포도플라자의 관장을 맡게 된 것도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나요?
2004년 봄 즈음부터는 와인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나라셀라의 자문을 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 포도플라자 건립이 추진 중이었는데, 건물 자체가 와인과 음식을 주제로 한 복합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구상하고 있었죠. 그 때 디렉터 자리를 제안 받아, 오픈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이 자리를 맡아왔어요.


오랜 세월 와인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한국의 와인 시장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느끼신 부분이 많을 것 같아요. 사람에 대한 부분은 어떤가요. 20년 전과 비교해보면 지금은 우리나라에 와인전문가라 부를만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아졌죠.
‘소믈리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실질적인 경험을 많이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소믈리에들은 이론적인 부분을 많이 공부하지만 거기에 다양한 경험이 더해져야 해요. 그게 소위 말하는 ‘내공’인데, 깊이 있는 접근을 하고 나면 언제든 그것을 다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요. 와인을 알수록 겸손한 자세로, 개인적인 목표를 세우고 나아가야죠. 


와인을 평가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와인을 마시면서 터득한 저만의 방식으로 와인을 평가해요. 간단하죠. 향과 맛, 그리고 바디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어느 정도의 밸런스를 가지고 있는 와인인가에 대한 판단을 합니다. 저는 기술적으로 향을 분석하는 데 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요. 그건 양조자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가장 큰 기준은 ‘밸런스’로군요.
그렇죠. 자연스러운 균형감 같은 거예요. 저렴한 와인 중에서도 밸런스가 좋은 와인들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밸런스에 따라 숙성 능력도 달라지고, 음식 매칭도 달라지죠. 저만의 기준이지만 외국의 평론가들과 이야기해볼 때 비슷한 기준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와인 강의를 하실 때, 특히 초보자들에게 가장 강조해서 말씀하시는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초보자 강의에서는 와인 테이스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와인의 일생을 이야기해요. 포도가 생산되는 가장 첫 순간부터 와인이 테이블에 올라 음식과 만나기까지 전 과정을 포함해서 기본적인 설명을 합니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숲을 본 뒤에 나무를 보는 거죠.


‘와인’이라는 인생의 뚜렷한 테마를 가지고 지금까지 탐구해오셨는데, 앞으로의 길을 예견해본다면 어떨까요?
무엇이든 한 가지를 계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아이템을 잘 잡아야 하고 좋은 에너지가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에너지가 생기게 하는 게 곧 열정이죠. 와인과 관련된 저의 개인적인 꿈이 있다면 와인 책을 열 권 정도 남기겠다는 거예요. 책을 내는 기간이 몇 년씩 걸리고 있지만, 처음 책을 쓰면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꿈입니다. 와인에 대한 열정을 계속 유지하면서 해나가고 싶어요.

 

글_ 안미영

 

* 와인21닷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Posted by Miyoung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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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예술의 가치를 이어가는 와인

칸티나 자카니니


와이너리의 철학을 가장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바로 한잔의 와인을 천천히 음미해볼 때가 아닐는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칸티나 자카니니(Cantina Zaccagnini)의 수출 담당 매니저 안젤로 루찌(Angelo Ruzzi) 씨 역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최종 생산물인 와인이야말로 와이너리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와 철학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와인에는 단순히 그 자체의 품질만이 아니라 스태프, 클라이언트와의 상호 신뢰 등 정서적인 요소를 포함한 와이너리의 모든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안젤로 루찌 씨는 칸티나 자카니니를 통해 이탈리아 문화와 라이프스타일까지 느낄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지난 7월 18일 이탈리안 레스토랑 보나세라에서 개최된 칸티나 자카니니 디너는 그의 말대로 와이너리의 철학과 이탈리아, 특히 아브루쪼(Abruzzo) 지역의 문화와 만나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생산지와 포도품종이 다양한 만큼, 각 와이너리의 뚜렷한 개성을 느낄 수 있는 이탈리아 와인. 그 중에서도 아브루쪼 지역은 건조한 기후에 풍부한 일조량, 시원한 바닷바람 등 이상적인 환경을 갖춘 생산지로 손꼽힌다. 이 지역의 대표 와이너리라 할만한 칸티나 자카니니는 1978년 로마의 동남쪽 페스카라(Pescara) 지방에서, 현재 와이너리의 오너인 치쵸 자카니니(Ciccio Zaccagnini)의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와이너리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편이지만,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넓은 녹지대가 펼쳐진 아브루쪼 지역 중앙에 자리 잡고, 화학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며 자연 친화적인 방식으로 와인을 생산한다. 또한 모든 포도를 와이너리 소유의 빈야드에서 생산한다는 것이 중요한 철칙인데, 그 이유는 포도 생산의 전 과정을 와이너리에서 직접 관장하는 것이 품질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가격 대비 뛰어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한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칸티나 자카니니는 총 80헥타르의 포도밭에서 연간 약 50만 병의 와인을 생산하는 규모이며, 품질 개선을 위해 외부 양조학자들과 연계해 끊임없이 모니터링을 한 결과 1996년에는 ISO 9002 인증을 획득하기도 했다. 이들의 목표는 뚜렷한 개성을 간직하면서도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다. 칸티나 자카니니의 세심함은 패키지에도 표출된다. 일례로 작은 나뭇가지를 병목에 매단 일 비앙코 디 치쵸(Il Bianco di Ciccio) 같은 경우는 해당 빈야드의 포도나무 가지를 병에 달아서 출시해, 자연적인 생산 방식을 중시하고 떼루아를 존중하는 그들의 철학을 표현했다.

또 한가지 칸티나 자카니니의 흥미로운 움직임은 예술을 향한 열정인데, 와이너리 곳곳에는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와인이 단순한 술이 아니라 문화 요소인 만큼, 또다른 예술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고 신진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와인의 품질을 위한 노력만큼이나 자연환경과 예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칸티나 자카니니의 모토는 와이너리의 철학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생산하는 와인이 뚜렷하고도 포용력 있는 인상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 빈야드에서 가장 내추럴한 시스템을 구현하면서, 동시에 와이너리 주변을 지키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이어오고 있으니 말이다.

 

 

칸티나 자카니니 디너에서는 각 와인과 보나세라의 음식이 훌륭한 매칭을 보여주었다. 청량하고 발랄하거나, 혹은 진한 풍미에 묵직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던 이날의 개성 있는 와인들을 소개한다.

 

Vino Spumante Aster Extra Dry
트레비아노, 샤르도네, 리슬링을 사용해 오직 매그넘 사이즈로 생산된다. 옅은 볏짚 색깔이 보는 순간 상쾌한 기분을 선사한다. 풍부한 과일 향과 흰꽃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며 더운 날씨에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식전주이면서도, 테이블 위에서 시간이 흘러도 힘을 잃지 않는 스푸만테이다.

 

Il bianco di Ciccio 2010
연둣빛이 감도는 컬러에, 토스티한 향이 신선한 과일 향과 어우러져 독특한 풍미를 주는 와인. 트레비아노 80%에 샤르도네 20%를 블렌딩했다. 바디감이 있는 편이지만 알코올 도수는 11.5%로 가볍게 마실 수 있다. 농어 카르파치오와 함께 서빙되어 좋은 궁합을 보여주었으며, 신선한 샐러드와 생선 요리 등과 모두 잘 어울릴만한 와인이다.

 

San Clemente Trebbiano d’Abruzzo 2007
싱글 빈야드에서 트레비아노 100%로 생산되었고, 짙은 볏짚 색에 바닐라 향과 미네랄 느낌이 균형 있게 어우러진다. 칸티나 자카니니 최고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선별하고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발효시켜 뚜렷한 바디감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이다. 부드러운 질감을 보여주면서도 피니시가 강한 편이고 긴 여운을 남긴다. 

 

Chronicon Montepulciano d’Abruzzo 2006
‘크로니콘(Chronicon)’은 아브루쪼 지역의 오랜 성당인 산 클레멘테(San Clemente) 성당의 수도사가 쓴 책에서 따온 이름. 삼나무, 체리, 무화과 향 등이 올라오는 균형감 뛰어난 와인으로, 부드러운 탄닌 덕분에 목넘김이 좋다. 몬테풀치아노 100%로 연간 5만 병 정도 생산되며 10년 정도 숙성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San Clemente Montepulciano d’Abruzzo 2005
명실공히 칸티나 자카니니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붉은 과일 향에 민트와 향신료 향이 독특하다. 15년에서 20년 정도로, 숙성 잠재력이 매우 뛰어난 와인인 만큼 2005년 빈티지 역시 시음하기에는 이르다는 느낌. 파워풀한 탄닌과 감칠맛이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긴다. 대부분의 육류와 잘 어울릴 법하며, 양갈비와도 좋은 마리아주를 이루었다.

 

Clematis Passito Rosso
국내 미수입 와인으로, 이번 칸티나 자카니니 디너에서 특별히 소개되었다. 진한 블랙커런트, 토바코 향 등이 올라오는 디저트 와인. 몬테풀치아노 100%로 생산되었으며 건조시킨 포도의 농축된 잔당이 매력적인 집중도를 보여준다.

 

글_ 안미영

 

* 와인21닷컴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Posted by Miyoung 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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